환영은 그 날 이후로 늘 내 곁에 머물렀다. 사실은 언제라도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충격의 여파인지 피로해 질 때마다 사고 당시의 감각이 너무 생생히 되살아나 별 수 없이 병원을 가보기는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근본적인 원인은 털어놓을 수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환영의 존재는 내게 닥친 불행을 와닿게 해주었...
둥근 테이블은 작은 편이었다.많지 않은 물건들로도 복작하게 채워질 만큼의 크기.그가 그 위를 가로질러 허리를 숙였을 때 토비오는 잠시간 호흡을 멈췄다.숨을 내쉬면 그대로 그에게 닿아버릴 것 같은 거리였다. "햇볕이 너무 뜨거운가?" 돔 형식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과하며 색을 입은 태양빛이 위를 올려다보는 얼굴을 물들였다.늘어지는 말꼬리가 전에 없이 ...
"이제 됐으려나…."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벽 너머를 살폈다. "따라와, 토비오." 앞장 선 그의 뒤에서 바라본 테라스에, 경계했던 의문의 안개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소매 끝을 만지작대던 손이 잠잠해졌다. "여기 앉으면 돼." 그는 금색의 몰딩이 반짝이는 통창 가까이로 빠르게 걸어 들어가 그 아래 놓인 의자 두개를 중앙의 테이블 옆으로 가져다 놓았다....
"나도 하나 물어봐도 돼?" "아, 네! 물론입니다!" 어느샌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토비오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합이 바짝 든 채 대답했다.조용히 하래도, 살짝 소리내어 웃는 그의 모습에 소년의 얼굴이 언뜻 붉어졌다. "자기소개 타임인 것 같으니까.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넌 누구야?" 토비오는 잠시 고민했다.줄곧 누군가를 만나면 이런저런 질문을 ...
감사인사를 하든, 뭘 묻든.그를 만난 후에야 할 수 있을 터였다.아는 것이라고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목소리가 전부인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인데도 어쩐지 벽이 느껴지지는 않았다.천천히 걷던 토비오는 문득 숨 쉬기가 편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일자로 곧게 뻗은 복도는 방 내부와 마찬가지로 창 하나 나있지 않은 곳이니 아마 심리적인 문제였겠지만 그 이유를 ...
토비오가 깨어났을 때 쯤, 바깥은 이미 어둑해져있었다.초여름의 해는 길게 마련이었지만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만큼 오랜시간 잠에 빠져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방에는 창이 없었고 시계 상점 수준으로 빼곡히 들어찬 벽면의 다양한 시계들은 죄다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어서 토비오에게는 별다른 시간 개념이 주어지지 않았다.푹신한 침대와 포근한 향의 이불이 ...
'보쿠토씨! 손, 잡으세요! 이쪽으로,' 도저히 역방향으로는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었다.혼비백산의 인파 속에서 나는 입구를 향해 떠밀려 가고 있었고 몇 발짝 뒤에 있던 그 사람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먼저 나가, 아카아시! 바로 뒤따라갈게, 앞으로 가!''아,' 손을 뻗어 보아도, 맞잡을 수 없었다. '..빨리, 빨리 오셔야 합니다!' 그 말이 전해지...
'전부 잃을 준비를 하라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귓가에 한참을 맴돌았다.목에 열이 오를 즘이 되어서야 겨우 멈춰서 숨을 고를 수 있었다.익숙한 골목길이 보였다.그제서야 느즈막히,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그건 뭐야.' 옆 건물의 유리 문에 비친 제 모습이 실로 멍청해 보였다.상당한 몰골에 웃음이 날만 했는데도 토비오의 입꼬리는 올라갈 ...
패러나이트.거의 모든 생명의 여생을 내다볼 줄 아는 그것은, 특별한 계약을 통해 소유자가 된 이의 심장에 기생하여 살아가며, 선천적으로 강하고 묘한 기운은 숙주의 정신을 쉽게 함락시킬 수 있다.대부분의 소유자가 주술사인 것은 그 때문이다.개중에서도 우수한 이들은 그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계약을 맺은 자만이 공유할 수 있는 수많은 능력들은 물...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나이 든 주술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내내 유지해오던 긴장을 풀어버린 그 찰나의 순간에 일이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남의 물건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뭘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어?" 길게 늘어진 보랏빛 장막 뒤에서부터 뻗어나 있는 검은 형체.언뜻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그것이 그가 말한 '물건'인 듯 했는데, 잔뜩 말라 비틀어진 ...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대의 하굣길에는 오늘따라 유독 사람이 없고 조용했다.주홍빛 노을 아래 온통 붉어진 시야.살결과 솜털에 스치는 바람은 포근했고, 꼭 설렘같은 긴장을 느끼며 근처의 놀이터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많아봐야 다섯 걸음이면 닿을 수 있을만한 거리에 높지 않게 솟아있는 느티나무와 낡은 벤치 하나가 비스듬히 내리쬐는 빛을 받아 적당한 그늘을 만들...
그늘진 교실, 낡은 선풍기가 잔잔한 소음과 함께 만들어내는 바람과 창문을 통해 가득히 시원하게 밀려드는 초여름의 향. 귀를 기울이는 모든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아득하고도 평화로운 날이었다.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흩날리고 있었다.고개를 조금 숙여 손 아래에서 팔랑이는 회색종이를 내려다 보았다.매년 이맘때쯤 열리는 축제의 주요 행사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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